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이즈미 준이치로 (문단 편집) ==== 두 차례의 [[북일정상회담]] ==== [[북한의 핵개발|북핵문제]]로 인한 고립을 돌파하기 위해서 2000년대 이후 개혁개방적 면모를 한창 보이던 [[김정일]]은 2000년 6월, [[대한민국|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2000 남북정상회담|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같은 해 9월에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10월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각각 회담을 마쳤다. 하지만 [[조지 W. 부시]]가 예상을 깨고 [[앨 고어]]를 꺾고 당선 되면서 상황은 뒤집힌다. 그러나 북한의 평화공세는 계속되었고, 결국 2002년 9월 전격적으로 [[평양시|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와 일북 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당시 김정일은 고이즈미에게 "[[한일기본조약|남한에 8억 달러 줬으니]] 우리에게도 100억 달러는 줘야 한다"면서 속마음을 넌지시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일본과의 실무협상을 맡은 사람은 'X'라 불린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는데 일본에서 그의 정체를 간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간단한 신상조차 캐낼 수 없었다. 다만 일본 측에서 성의를 보이려면 스파이 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된 일본 기자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하자 정말로 석방해주는 등 막강한 힘이 있던 인물임은 분명한데 이후 북한 인질외교의 대가였던 보위부 부부장 류경이라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다. 만약 류경이 맞다면 그는 2010년 이명박과의 남북정상회담 성사 실패 이후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북한의 [[납북 일본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 사회의 반북 감정이 심화되기 시작한다.[* 아베 신조 당시 관방장관 역시 고이즈미와 동행하여 2차례 평양을 방문했는데, 이때 그가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부각시켰다는 얘기가 있다.] [[요코타 메구미]](橫田めぐみ)의 부모를 비롯한 납북자의 가족들이 연일 시위하면서 납북 일본인 귀국을 촉구했고, 이에 고이즈미는 "납북 일본인의 존재를 밝히고 사죄하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당혹한 김정일은 "오후에 대답하겠다"고 자리를 피한 다음, 결정을 내렸는지 그날 오후 일본인 납북 문제를 시인하고 사과한다.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던 김정일이 한발 물러선 것이다. 납북자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요코타 메구미]]의 경우에는 죽었다고 둘러대면서 실체가 불분명한 유골만 돌려주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소가 히토미]]를 비롯해서 그때까지 살아있는 일본인들의 귀국을 성사시키는 등 업적은 분명히 있었으며, 남북자 가족들이 그의 귀국 때 항의시위를 하자 특유의 승부심을 발휘하여 자신에게 항의하는 유족회 사람들을 마주하여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이 그들의 비난을 들었고, 이에 일본 민심이 유족회를 비난하고 고이즈미를 옹호하면서 지지율 급등의 호재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허나 북미 관계가 개선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이즈미 내각이 북한과 수교를 서둘러봤자 얻을 것보단 잃을 것이 더 많아보였고, 이런 모험을 할 수 없던 고이즈미에 의해 결국 북일수교는 무산되고 만다. 당연히 북한은 제2의 [[경술국치]], 제2의 [[을사조약]] 운운하면서 길길이 날뛰게 된다. 이후 지금까지도 북한과 일본은 납북자 문제를 가지고 지리한 외교적 공방을 벌이면서 관계 개선은 올스톱된 상태이다. 한편, 고이즈미도 일본에선 납북자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북한 [[칠보산]] 송이를 받아온 일은 일본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결국 본전도 못 건지고 요미우리 신문과 대립이 더욱 심해지면서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까지 썰리는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